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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석사 전성기 가람 배치를 완성하다
    부석사이야기 2022. 11. 26. 10:25

    부석사 주라청 명문 기와 탁본

    세계문화유산이자 화엄종찰 부석사의 전성기 사역은 어디까지였을까. 부석사의 사역이 지금의 범위보다 훨씬 넓었음을 보여주는 부석사 주라청글씨가 새겨진 기와 등이 최근에 발견돼 부석사 사역 범위에 대한 논의와 학술조사의 시급성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의 부석사는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 남쪽 산기슭에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남북 축선을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현재 무량수전이 있는 북지리 148번지와 범종각, 천왕문 등의 구역과 동쪽으로는 봉황선원과 동부도전, 서쪽으로는 관음전과 화엄선원 및 서부도전, 북쪽에는 조사당, 자인당, 영산전 등의 전각과 시설들이 배치돼 있다.

    그동안 부석사와 관련된 연구나 조사는 지금사역 범위에 국한돼 있지만 전하는 말에 따르면 무량수전 동서 10리에 걸쳐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의 부석사 동쪽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220)이 있었던 북지리 179번지 일대는 한때 동방사지(東方寺址)로 불렸던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동방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 부석사 동쪽에 있는 절터라는 뜻이 잘못 인식돼 그렇게 불렸다.(임천,영주 부석사 동방사지의 조사, 고고미술27, 1961 참조)

     

    예전부터 이곳 동방사지일대에서는 통일신라부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기와들이 많이 확인되고 있는데 그중에 천장방(天長房)’이 새겨진 명문 기와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돼 부석사 창건이후 고려말까지 중요한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곳에 자리한 석조여래좌상은(보물 제220) 우리나라 최초의 삼신불(三身佛)이 봉안됐던 곳으로 미술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1958년 약식 조사 후 그대로 방치된 채 과수원으로 경작되면서 유적 훼손이 심각한 상황이다.

    동쪽 폐사지의 경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방사로 잘못 알려져 부석사와는 별개의 사찰로 취급돼 왔지만 최근 현 부석사 서쪽 지역에서 전성기 사역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 발견됐다.

    지난해부터 부석사 서쪽 사역을 조사해온 건국대 건축전문대학원 이종원 교수가 수습해 부석사성보박물관에 전달한 많은 명문 기와들 가운데 부석사 주라청(浮石寺 周羅)’, ‘통화 26(統和二十六年, 1008)’, ‘천흥(天興, 중국 금나라 애종 때의 연호, 1232~1234)’ 등이 새겨진 기와는 11~13세기의 것으로 부석사 전성기 때의 절의 공간적 범위를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 유물이다.

    이들 중 부석사 주라청명문기와는 고려초에 제작된 것으로 격자문 바탕에 글이 새겨져 있다. 주라청에 대한 문헌자료는 확인되지 않지만 주라는 처음 승려가 되려고 머리를 깎을 때 스승이 가장 나중에 깎아 주는 정수리의 머리카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승려집단의 출가와 관련된 단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주라용례는 1023년 조성된 합천 영암사 적연국사(寂然國師, 932~1014) 자광탑(慈光塔) 비문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적연국사가 삭발한 뒤 그 머리카락을 따로 보관했다다는 소락주라(所落周羅)’가 보인다. 1060년에 건립된 칠장사 혜소국사비(七長寺 慧炤國師碑)에도 국사가 광교사(光敎寺)에 가서 충회대사(忠會大師)를 은사로 하여 정수리에 있는 주라(周羅)를 잘라 버리고(大師忠會頂落周羅...)라는 비문도 있다.

    또한 고려 문종의 장인이자 문신인 이자연 묘지명(李子淵 墓誌銘, 1061)에는 그의 아들 가운데 다섯째 소현(韶顯)이 어려서 삭발 출가해 유가업(瑜伽業) 대선장(大選場)에 한 번에 급제하여 대덕(大德)이 되었다는(韶顯少削周羅一捷于瑜伽業大選場為大徳) 내용에서도 주라가 확인된다. 또 복흥사 경덕국사묘지명(福興寺 景德國師墓誌銘, 1072)에서도 국사가 스스로 머리를 깎았다(師自削周羅)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부석사 주라청명문와는 어떤 성격을 가진 건물에 올린 기와였을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라청은 승려들의 출가와 관련된 건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 당송대 출가 관련 자료에서 중요한 단서를 확인할 수 있다.

    중국 당송대에는 처음 승려가 되고자 절에 들어 온 행자는 사미계를 받기 위해 승록사(僧錄司)에서 주관하는 고시를 통과해야 했다. 고시에 합격한 행자는 도첩과 부역 면제증인 면정유(免丁由)를 받아 해당 총림으로 돌아온 뒤 득도식에 참여하는데 수계식 당일 삭발을 할 경우 번거로워 하루 전에 머리카락 대부분을 삭발하고 정수리 머리카락(주라) 일부를 남겨 놓는다. 수계식 당일에는 10계를 낭독한 후 스승이 남은 주라를 깎아 주는데 그 전날 머리를 깎는 것은 계를 받을 행자가 많았음을 의미한다.(윤창화,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 민족사. 2017)

    사미율의에는 7세부터 13세까지 구오사미(驅烏沙彌)’라 하여 아직 일을 감당할 만한 나이가 아니라 스님들을 위해 부엌이나 좌선하는 곳 등에서 새를 쫓거나 하는 작은 노력으로 복과 선을 생기게 하는 일을 한다. 14세부터 19세까지는 응법사미(應法沙彌)’라 하여 스승을 섬기면서 참선과 경전을 익힌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9세기부터 13세기 조성된 고승 비문을 살펴보면 10대에 출가해 20세 전후 구족계를 받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다면 10대의 나이에 출가한 이들은 짧게는 수년 길면 10년 가까이 사찰에 머물게 되는데 이들의 교육을 담당한 사찰내 기관이 있었음은 자명하다.

    부석사에서 출가한 혜철선사는 15세에 출가하여 22세에 구족계를 받았는데 적인선사비에 따르면 부석사에는 동배(同輩) 즉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미 혹은 행자들이 다수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와함께 조선 후기인 1755년 무안 법천사에서 34명의 동자에게 한꺼번에 사미계를 준 사례도 있다.(연담대사임하록)

    희양산문을 개창한 지증대사도 10세 즈음 출가하여 부석사 범체대덕에게 화엄을 배우고 17세에 경의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사자산문 도윤(道允)선사도 7세때 오관선사에 가서 진전법사에게 출가해, 15세에는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배웠고 19세에 백성군(白城郡) 장곡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음이 그들의 행장을 적은 비문에서 확인된다.

    이들 기록을 토대로 당시 출가에서 득도까지의 과정을 정리해 보면 동진 출가한 행자들은 출가한 사찰에서 몇 년간 사찰 예절 등을 배우며 기초 지식을 습득한 뒤 15세 즈음 사미계를 받는다. 이후 강원과 같은 큰 절의 교육기관에 들어가 4~5년간 경전 등을 배운 다음 정부에서 지정한 계단 사찰(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부석사에도 이와 같은 사미전문 교육기관이 있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곳이 바로 주라청이다. 주라청과 비슷한 사례로 중국 송대에는 부모의 허락을 받고 절에 들어온 행자들은 경내에 있는 동행당(童行堂)’에 머물며 사미가 되기 위한 여러 교육 등을 받는다고 하는데 동행당과 주라청이 같은 성격의 기관으로 보인다.(카마다 시게오, 정순일 역 중국불교사, 경서원. 1985)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부석사 주라청에 등장하는 관청을 의미하는 ()’자이다. 명문기와에 새겨진 주라청이 부석사만의 교육기관인지 아니면 국가에서 인정하고 지원하던 정식 승려교육기관이냐는 것이다. 조선후기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어산청(魚山廳), 보사청(補寺廳)의 용례로 보아 주라청에 쓰인 청은 정부의 관청 개념보다는 사찰 소속의 기관으로 보이지만 추가적인 자료보완과 연구가 필요하다.

    고려시대의 사례를 들어 본다면 총림 혹은 본사와 같은 큰 절에는 다수의 동진 출가자들을 수용할 만한 안정된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과거준비생들이 사찰에서 기초적 소양을 닦거나 사학(私學)의 하기수련(夏期修練)인 하과(夏課: 고려 시대 벼슬하지 못한 선비들이 절에서 50일 동안 들어가 고문(古文), 고시(古詩), 당송(唐宋)의 시를 외며 공부하고 글을 짓던 일)도 사찰에서 실시했다는 사실은 참고해 볼 만하다.(허흥식, 고려 과거제도사 연구, 일조각. 1993)

    한편 부석사 주라청과 통화 26(統和二十六年)’, ‘천흥(天興)’명 명문기와의 발견은 그동안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한 부석사 사역 연구에 대한 획기적인 전환점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동쪽 사역에서 발견된 천장방등의 명문기와와 현재 사역 주변에서 출토된 대장당’, ‘대봉지원등의 명문기와를 비롯해 이번에 확인된 부석사 주라청등 명문기와는 전성기 부석사 사역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다.

    부석사 전성기 사역은 동쪽 佛에서 시작해 무량수전이 있는 곳이 法, 그리고 주라청기와가 발견된곳이 僧으로 구성돼 있었다. 한마디로 현재 남은 부석사 사역은 전성기의 1/10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들 명문기와를 바탕으로 부석사 전성기 사역을 펼쳐보면 봉황산 자락에 삼보(三寶)를 상징하는 3개의 축선으로 사역이 형성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즉 보물 제220호 출토지인 부석면 북지리 179번지 일대는 금당(金堂)이 있는 불()을 의미하고, 무량수전과 대장당’, ‘강당등의 명문기와가 출토된 북지리 148번지 일원은 법()에 해당한다. 이어 이번에 부석사 주라청명문기와가 발견된 북지리 80~90번지 일대는 승려 교육기관 및 거주지로 ()’을 의미한다. 즉 부석사 전성기 사역은 동쪽에 불보(佛寶), 중앙에 법보(法寶), 서쪽에 승보(僧寶)를 상징하는 전각들이 중심에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부석사 전성기 사역은 경작과 개발로 인해 훼손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영주시에서 발주한 영주 부석사 관광지 조성사업부지부석면 북지리 247번지 일대에서는 부석사 창건 전후 것으로 보이는 유구가 확인되었다. 아직까지 이곳에 대한 조사는 시굴 단계에 멈춰 있고, 현재는 그마저 중단된 상태다.

    그동안 부석사 주변에 대한 개인적인 지표 조사 결과 조사당을 중심으로 남쪽 500m, 동쪽 1, 서쪽 1.5가량의 구역이 전성기 사역으로 추정된다. 특히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석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4) 주변은 부석사 다비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원융국사비에 국사의 다비를 부석사 동쪽 구릉에서 거행했다는(浮石寺 東崗 禮)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조사성과는 부석사가 국찰(國刹)로서의 규모와 화엄종찰로서의 성격을 규명해내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영주시 차원에서 이루어진 부석사 주변 발굴은 이제 국가적인 사업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제공하기 충분하다. 이에 따라 농지경작과 관광지 개발 사업으로 인해 훼손되고 있는 부석사 전성기 사역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사적 지정과 함께 정밀지표조사는 물론 그 결과에 따른 발굴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부석사의 승려교육기관 주라청이 있었던 곳의 현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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