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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석사이야기 17
    부석사이야기 2015. 2. 24. 10:53

    “1300여 년 된 우물, 부석사 법맥과 함께 해”

    부석사 이야기 17 - 창건 일등공신 선묘낭자의 유적
    부석∙식사용정∙선묘정∙선묘각∙석룡 등 5가지 남아 있어

    2015-02-09 (월) 13:22

    김태형 | jprj44@hanmail.net


    부석사를 말하면서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물론 창건주 의상 스님은 당연하거니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선묘(善妙) 낭자’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다시 그 설화를 언급한다는 게 사족(蛇足)을 다는 것과 다를 바 없지만, 이미 알려진 얘기가 아니라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무심히 혹은 관심 밖의 대상으로 치부되는 유적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선묘낭자와 관련된 일화는 실제 우리의 기록인 『삼국유사』나『삼국사기』,『동사열전』등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다. 다만 중국의 『송고승전』과 일본의『화엄연기』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왜 한국의 기록에서는 이런 내용들이 전하지 않고 중국과 일본의 기록에서 선묘낭자의 설화가 전해져 오게 된 걸까. 그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그와 관련된 유적이 남아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선묘낭자가 사방 1리(里)나 되는 거석(巨石)을 허공에 날려 권종이부(權宗異部)들을 내쫓았다는 대목에 대해 19세기 중반에 편찬된『재향지(梓鄕誌)』에서는 ‘절의 스님이 전하는 말에 의상 스님이 길지를 찾으면서 손으로 큰 돌을 떨치니 날아와 금당 뒤에 떠 있다가 7일이 되어 땅에 내려졌다고 한다’고 하였다.


    18세기 중반에 제작된『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도 선묘낭자 설화는 언급이 없고 다만 ‘부석 동쪽에 선묘정(善妙井)이 있고, 서쪽에는 식사용정(食沙龍井)이 있어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만 하였다.


    현재 부석사에 남아 있는 선묘낭자 관련 유적으로는 모두 5개 다 있다.
    첫 번째는 부석사의 사찰명이 유래된 ‘부석(浮石)’이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여지도서)』등에 소개된 ‘선묘정’과 ‘식사용정’, 네 번째는 선묘각, 다섯 번째는 석룡(石龍)이다.


    부석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으니 별도의 설명은 하지 않고 다만 18세기 중반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불전 뒤에 큰 바위 하나가 옆으로 서 있는데, 그 위에 큰 돌 하나가 지붕을 씌운 듯하다. 얼핏 보면 위아래가 서로 이어진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두 돌 사이가 서로 이어지거나 눌려 있지는 않다. 조금 빈틈이 있어, 노끈을 넘기면 걸리지 않고 드나든다. 그제야 비로소 떠 있는 돌(浮石)인줄 알게 된다. 절이 돌 때문에 ‘부석사’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이렇게 떠 있는 이치는 자못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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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상대사가 부석사 창건 당시 이 터를 미리 선점하고 있던 세력들을 몰아내고자 선묘낭자가 용으로 변해 이 부석을 허공에 날렸다고 한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돌 사이로 실을 통과 시키면 걸리지 않고 드나든다고 한다.

     

     

    아는 사람들은 알고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는 선묘낭자 관련 유적이 바로 ‘식사용정’과 ‘선묘정’이다.
    우선 그 위치부터 확인해 보면 식사용정은 현재 부석사 종무소 건물 사이에 있고. 선묘정은 지장전 아래에 있다.


    식사용정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나타나 있지만 오래 전부터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 유명하다. 이와 관련한 기록이 조선중기 인물인 박선장(朴善長, 1555~1616)이 지은 ‘식사정기우제문(食沙井祈雨祭文)’이 있다.

     

    食沙有井 龍神是宅. 식사라는 우물이 있으니 바로 용신이 머무는 집이다.
    興雲作雨 素稱澤物.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려 평소 만물을 윤택하게 하네.
    嗟余守土 政多失節. 애석하다, 나라를 지키매 정사에 많은 실정이 있으니
    値此旱魃 不日不月. 이렇게 가뭄이 생긴 지 몇 날 몇 달인가.
    原濕暵乾 川澤枯竭. 물이 말라버리고 시내와 연못도 고갈되어
    秧種未播 牟麥燋黃. 모내기도 못하였으니 보리도 누렇게 탔네.
    東作旣愆 西成敢望。봄농사를 망쳤으니 어찌 가을 추수를 기대하랴.
    田畯束手 號泣于途. 전준(농사를 관장하는 신)도 속수무책 통곡소리 끊이질 않네.
    伊今之災 咎實在吾. 지금 이 재앙은 모두 나의 잘못이니
    哀我民生 何罪何辜. 가여운 우리백성에게  무슨 죄와 허물이 있겠습니까. 
    玆余自責 虔告才忱. 이제 스스로를 책망하며 정성을 드리오니
    井渫不效 龍獨何心. 우물을 치고도 영험이 없다면 용이시여 장차 무슨 마음을 내겠습니까.
    庶幾一起 遄注甘霖  풍족하게 단비를 내려주옵소서.


    『수선선생문집(水西先生文集)』
     
    또한 박종의 『청량산유록』에는 ‘앞에는 식사정(食沙井)이 있는데, 깊이는 4, 5길이다. 위에는 작은 모래 언덕이 있는데 절을 지을 때에 신룡의 이적이 있었다. 의상이 비구로 하여금 경주(慶州)의 유사(流沙)를 취하여 와 한 곳에 모아 언덕을 이루어 용의 먹이로 삼았다’고 전하는데 식사용정은 지금은 잘 정비하여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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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영험이 있다고 전하는 식사용정. 필자가 30여 년 전 부석사에서 본 식사용정의 물빛은 우윳빛으로 이를 두고 ‘음수(陰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식사용정과 함께 선묘의 설화가 담긴 우물이 바로 선묘정이다. 식사용정과는 달리 우윳빛이 아닌 맑은 물로 『청량산유록』에는 ‘왼쪽에는 선비정(仙妃井)이 있는데 한 선녀가 물을 길어 의상에게 아침저녁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선비로 이름을 지었다. 매번 입춘에 물이 차고 빠지는 것으로 풍년과 흉년을 점친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때 문인인 박효수(朴孝修, ?~1377)는 부석사의 선묘정의 물을 마시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鳥啼花落減芳年(조제화락감방년)   새 울고 꽃이 지니 꽃다운 나이는 줄어들고
    客路光陰志忽然(객로광음지홀연)   나그네 길 짧은 세월에 뜻은 홀연히 사라지네.
    何月試茶龍井水(하월시다용정수)   어느 달에 용정수로 차를 다려 마실까?
    滿軒松月共夤緣(만헌송월공인연)   추녀 끝 가득한 솔과 달은 함께 엉켜 있네.

     

    13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이 두 우물이 마르지 않고 부석사의 법맥과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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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사용정과는 달리 맑은 물빛인 선묘정은 해마다 입춘이 되면 그 물의 많고 적음을 보고 풍년과 흉년을 점쳤다고 한다. 또한 물맛도 좋아 차를 다리면 그 맛과 향이 더욱 깊다.

     

    선묘설화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유적이 두 군데이니 그곳은 선묘각(善妙閣)과 석룡(石龍)이다. 선묘각은 무량수전 동쪽에 위치한 작은 전각으로 2013년 증축하여 조금 더 넓고 아담하게 지어졌다.


    최근까지 선묘각에 있던 선묘영정은 현재 조사당 안에 봉안되어 있는데, 이 그림은 1975년 10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일가의 시주로 조성된 것이다.
    선묘각의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15년 무량수전 해체수리 전에 찍힌 사진에도 나타나고 있어 조선후기에도 지속적으로 향화를 공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문헌기록에는 ‘선묘각’과 관련된 자료가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1884년 태허당 명학(太虛堂明鶴) 스님이 부석사에 와서 ‘보덕각(普德閣’이라는 건물을 중수한 사실이 남아 있다.


    이 중수기에 따르면 보덕각은 부석사 창건 때부터 있었던 건물로 창선징악(彰善懲惡: 선한 일은 모두에게 드러내어 찬양(讚揚)하고, 악(惡)한 일은 징벌(懲罰)의 장소였다는 것이다. 선묘각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중수기의 내용대로 라면 선묘각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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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일가의 시주로 조성된 선묘낭자 영탱.


    끝으로 선묘설화의 정점은 석룡(石龍)이다. 이와 관련한 기록으로 앞서 소개한 『청량산유록』에는 ‘전각의 계단 아래에는 땅에 솟아난 돌이 있는데 고기의 꼬리 형상을 하고 있다. 이 기반은 용혈이 되는데 용의 전체는 불좌(佛座)에 들어가 있고 아래의 꼬리는 계단 아래에 보이는 것’이라고 하여 이미 조선시대에는 석룡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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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묘낭자의 영정이 모셔진 선묘각. 최근 증축을 하여 참배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이후 석룡과 관련된 가장 정확한 기록은 1967년 5월 8일자 「한국일보」의 기사다.
    당시 신문기사를 발췌해보면 ‘전설(傳說) 천삼백 년…….석룡 발굴’이라는 제목으로 ‘발굴된 석룡은 무량수전 서단(西端)의 돌층계와 기단의 서단사이에 허리를 걸치고 꿈틀거리듯 반원형을 그리면서 하반부를 드러내고 있으며 기단에서 약 1.8m 나와서 허리가 끊겨져 있었다. 6일 아침부터 석룡 발굴 작업을 시작한 조사단(신라오악조사단)은 무량수전 앞기단을 따라 일직선으로 시굴하던 중 드디어 7일 하오 기단 서쪽에서 석룡의 모습이 드러나자 작업에 피치를 올렸다. 조심스럽게 진행된 발굴 작업이 지면에서 약 한자가량 파고들었을 때 화강암으로 된 석룡의 등이 완전히 나타났다. 허리가 끊긴 채 그 모습을 드러낸 석룡은 인공적인 조형은 전연 없으며 자연석 그대로 용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하 생략)’고 전한다.

     

    지금까지 부석사 창건의 1등 공신 선묘낭자와 관련된 유적들을 살펴보았다. 전국의 천년 고찰들의 다양한 연기설화가 있지만 부석사처럼 로맨틱하면서도 극적인 이야기를 가진 경우는 드물다. 더구나 이를 뒷받침하는 유적들이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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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5월 신라오악조사단에 의해 석룡을 발굴하여 확인했다는 한국일보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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