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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법공양 올려 무량수불을 찬탄하다
[김태형의 부석사 이야기]16-국보 제17호 무량수전 앞 석등
“배례석은 봉로대로 향을 공양하는 단”
석등 화사벽 보살상은 꽃․과일․차․음식 공양2015-02-04 (수) 13:23
김태형 | jprj44@hanmail.net
부석사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아름다움을 격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유물 중 하나가 바로 국보 제17호로 지정된 무량수전 앞 석등이다.
이 석등은 석등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함께 시시각각 사계절의 변화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그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해가 뜨는 오전과 태양이 머리위에 있는 정오, 그리고 소백산 연봉으로 기우는 저녁 해와 노을, 때로는 봄날 무량수전 서쪽의 돌배나무 꽃과 석양이 어우러진 주변 풍경과 함께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와 함께 이 석등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다. 어쩌면 연구자들의 게으름일지도 모르겠지만 지난 번 기고한 무량수전이 갖는 의미와 가장 부합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무량수전에 대해 지난 호에서 ‘아미타불이 상주 설법하시는 칠보강당’이라고 했다.
『불설무량수경』의 해당 내용을 다시 살펴보면“법문을 들은 대중들은 환희에 넘치며 마음이 열리고 진리를 깨닫지 않은 이가 없느니라. 이때 사방에서 자연히 미풍이 불어와서 보배나무에 살랑거리면 다섯 가지의 미묘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헤아릴 수 없는 천상의 꽃들이 바람에 날려 와서 비 오듯이 온 세계에 흩날려 춤을 추느니라. 이와 같이 자연의 공양이 끊임이 없는데, 모든 천신(天神)들도 백천 가지의 꽃과 향과 천만 가지의 음악으로 아미타불과 여러 성문과 보살들을 공양하고 꽃과 향을 뿌리며 갖가지 음악을 연주하면서 서로 앞뒤를 연달아 오고가고 하는데 이때 대중들의 즐거움은 말로는 다할 수 없느니라.”
이 『불설무량수경』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시기가 있다. 바로 4월 하순경이다. 무량수전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돌배나무와 산벚나무들이 그 즈음에 활짝 피고 또한 꽃잎을 날리는 때이다. 부석사 석등의 상징성을 가장 명료하게 알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봄날 돌배나무 꽃과 산벚나무 꽃잎이 휘날리면 그 경관은 무량수경의 한 장면이 그대로 연출되어 무량수불의 설법을 듣고 환희하는 성문 보살 대중들이 연상된다.
먼저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의 구성을 살펴본다.
석등의 기본적인 구조는 맨 아래 지대석을 포함한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 그 위에 화사석, 옥개석 등으로 구성된다.
국보 제 17호 석등도 동일한 구조로 먼저 하대석의 형태를 보면, 2매로 구성된 지대석 위에 8각의 하대석이 놓여 있다. 하대석은 연꽃 모양의 안상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 연잎과 더불어 8각의 모서리마다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모두 8개의 귀꽃이 있었으나 그 중 하나는 훼손되었고 나머지 7개 중 하나는 그 모양새가 좀 남다르다. 7개 중 6개는(아마도 8개 중 7개가 모두 그랬을 것인데…)양감이 풍부하게 조각되었지만 나머지 하나만 음각처럼 저부조로 조각되어 있다.왜 그랬을까. 조화 속의 부조화를 노린 의도적인 것인지 아님 조각 도중 석재에 문제가 생겨 하는 수 없이 저부조로 조각을 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8각의 중대석은 아주 늘씬하게 뻗어 상대석과 화사석을 받치고 있지만 결코 가냘프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 석등의 전체적인 비례도 매우 훌륭하지만 석등의 8각 화사석 4면에 새겨진 공양보살상들의 조각 또한 아름답다. 세월이 흘러 다소 마모가 있지만 얼굴에 남아있는 온화한 미소는 마치 석굴암의 본존불 주변에 조각된 보살상들을 보는 듯하다.
어두운 별과 함께 밤을 지새우는 국보 제17호 무량수전 앞 석등.
잠깐 이 석등과 관련된 일명 ‘배례석(拜禮石)’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석조물의 정확한 명칭과 용도에 대해 밝혀두는 것이 석등을 온전히 이해하고 필자가 느끼고 생각한 바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흔히 ‘배례석’이라 불리는 이 석조물에 대해 공양물을 올려놓거나 여기서 절을 했다고 하지만 이는 조금은 틀린 얘기다. 『불국사고금창기』에서는 이 석조물에 대해 ‘봉로대(奉爐臺)’라고 하고 석등은 ‘광명대(光明臺)’라고 하였다.
즉, 배례석은 바로 절을 하는 곳이 아니라 향로를 진설한 곳이다. 지금과 같이 성냥이나 라이터가 있어 향공양을 올리기 쉽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다. 더구나 향도 요즘과 같은 향이 아니라 가루나 떡처럼 되어 있는 향을 사용했기 때문에 향을 피우기 위해서는 향로에 숯불과 같은 화기가 항상 있어야 한다.목조건축은 특성상 화재에 매우 취약하여 작은 불씨라도 날리게 되면 큰 불이 날 위험성이 크다. 또한 향 그 자체가 금(金)과 같이 매우 비싸고 귀한 물건이므로 누구나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려국(高麗國) 광주(光州) 희양현(晞陽縣) 고(故)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 동진대사(洞眞大師) 보운탑비문(寶雲塔碑文)’과 ‘고려국(高麗國) 운주(運州) 가야산(迦耶山) 보원사(普願寺) 고국사(故國師) 제증시법인(制贈謚法印) 삼중대사(三重大師) 보승탑비명(寶勝塔碑銘)’에 따르면 법당 앞의 마당을 ‘향정(香庭)’이라 하여 실제로 법당 앞 봉로대에서 향을 피웠음을 알 수 있다.

배례석으로 불리고 있는 봉로대. 법당 안에 들어 갈수 없는 신도들을 위해 마련한 배려의 시설로 알려져 있지만 화재의 위험성 때문에 실내에 향로를 둘 수 없어 실외에 설치했던 향로 놓는 공양대이다.(왼쪽) 중국 돈황석굴 제12굴 주실(主室) 남쪽 벽 『무량수경』변상벽화에 등장하는 향공양 진설도. 봉로대의 중앙 연꽃무늬 위에 향로를 올려놓게 된다.(오른쪽)
이처럼 실외에 향로를 두는 것이 화재예방을 위해 최선책이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불교의식에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때 가장 중요한 공양물이 향(香)과 등(燈)이다. 향과 등은 공양에 있어서 빠지지 않는 한 조합이다. 석등이 등을 공양하는 의식구라면 배례석 즉 봉로대는 바로 향을 공양하는 의식구다.
따라서 석등과 봉로대는 별개의 공양의식구가 아닌 향과 등을 공양하기 위해 하나로 조합된 의식구라는 점에서 현재 남아 있는 사찰의 석등 앞에는 예외 없이 봉로대가 설치되어 있다. 봉로대 중앙에 연꽃이 조각되어 있는데 바로 이곳에 향로를 올려놓는다. 중국 돈황석굴 제12굴 주실(主室) 남쪽 벽 『무량수경』변상벽화 등에서 이러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국보 제17호 무량수전 앞 석등에는 등과 향공양외에 다른 의미가 없는 것일까.
석등의 화사벽에 부조된 공양보살상들의 지물들을 살펴보면 통일신라 당시 육법공양(六法供養)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먼저 동남방의 보살상을 보면, 화관(花冠)을 쓰고 있으며 양손을 가슴에 모아 공양물을 받들고 있다. 손에 들고 있는 지물의 형태로 보아 꽃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북면에 있는 보살상은 오른손은 길게 늘여 천의자락을 잡고 있으며 왼손은 엄지와 검지 등을 모아 뭔가를 쥐고 있다. 얼핏 보아 보주(寶珠)로 추정되지만 이 보살상이 취하고 있는 자세는 경주 석굴암 내 문수보살상과 매우 유사한 도상이다. 두 도상의 크기가 현격한 차이를 보이지만 문수보살상의 잔을 쥐고 있는 모습이나 석등의 공양보살상이 거의 동일한 모양을 하고 있다. 특히 한 손을 내려 천의 자락을 쥐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어 이 공양보살상은 차(茶)공양을 올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서북면의 공양보살상은 다른 공양보살상에 비해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이 보살상은 오른손을 오른쪽 가슴 위에 두고 왼손은 왼쪽 어깨까지 올려 손바닥 위에 포도로 보이는 공양물을 받들고 있다. 왼손바닥에 올리어진 공양물을 연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 형태나 기존의 도상들과 비교해 볼 때 연꽃보다는 통일신라시대 암막새에 등장하는 포도당초문의 포도와 유사하다. 따라서 이 공양보살상은 과일을 공양하고 있다고 본다.
서남면의 보살상은 양손을 명치 부분에 모으고 공양구를 양손으로 감싸고 있는데, 뚜껑이 있는 그릇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뭔가를 감싸 쥔 양손 가운데 위에 작은 돌기가 보이는데 이는 뚜껑이 있는 그릇의 뚜껑 손잡이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공양상은 음식 혹은 쌀을 공양하고 있는 보살상으로 보인다.

차(茶)공양을 올리는 보살(왼쪽).과일 공양을 올리는 보살(오른쪽)
천상의 음식을 공양 올리는 보살.(왼쪽) 꽃을 공양하는 보살.(오른쪽)
지금까지 화사벽에 부조된 보살상들의 지물을 살펴보았는데 이를 종합해보면 봉로대의 향공양, 석등의 등공양과 함께 화사벽의 공양보살상들은 꽃, 차, 과일, 쌀을 각기 공양하고 있는 모습으로 육법공양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석등의 조성연대와 관련하여 선행 연구자들은 9세기 중엽으로 보고 있지만 『삼국유사』‘의상전교(義湘傳敎)’조에 보면 의상 스님의 수제자였던 오진(悟眞) 스님은 현재 안동의 학가산 골암사(鶻嵓寺)에 살면서 밤마다 팔을 뻗쳐 부석사 석등에 불을 켰다고 한다. 원문에서는 ‘…점부석실등(點浮石室燈)’이라 하여 석등에 불을 밝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지 방(室)에 불을 켰다고 보아야 할지 의문이다.
다만 실(室)을 석등으로 해석한다면 국보 제17호의 조성연대는 의상 스님이 입적한 702년을 전후한 시기가 된다. 따라서 조성연대 또한 하한을 잡는다고 하여도 8세기 중반을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저녁 해가 잠시 석등에 머물러 불을 밝히고 있다.'부석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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