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성기 때 무량수전 축으로 일(一)자 배치”
[김태형의 부석사 이야기]14-조선후기 부석사 가람 구조
“동쪽은 별원 구역, 서쪽은 암자 구역으로 구분”2015-01-20 (화) 10:24
김태형 | jprj44@hanmail.net
사람이나 세상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다. 1천3백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부석사도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지만 과연 최전성기 부석사의 가람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기존의 연구 성과들의 대부분은 조선 후기의 부석사 모습을 언급하면 가람배치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매우 다른 양상이다.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부석사의 전성기 가람배치는 현재 무량수전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이어지는 일(一 )자형 가람배치를 하고 있었다. 무량수전 기준으로 동서가 10리에 이르는 그런 가람이 형성되어 있었다.
먼저 기록으로 남은 조선후기의 부석사 가람배치를 보면 먼저 임진왜란 직후에 쓰인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이 남긴 『계암일록(溪巖日錄)』을 보면 1615년 7월 부석사는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취원루, 동쪽에는 전각(응향각)이 있었고 중앙에는 안양루와 그 아래 계단 법당이 있었고 그 아래에 범종각이 있었다. 범종각 아래에는 사천왕상이 봉안된 회전문, 그 아래는 문수와 보현보살의 탱화(벽화)가 있는 조계문과 그 옆에 흥복료가 있으며 그 아래에 일주문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무량수전 동북쪽에 조사당이 있으며 서쪽으로 수십 보를 가면 영산전과 작은 암자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계암일록』보다 후대에 기록된 『재향지(梓鄕誌)』에 따르면, 금당(金堂: 무량수전) 서쪽에 취원루(聚遠樓)가 있으며 취원루 북쪽에 장향대(藏香臺)가 있고, 금당 동쪽에 상승당(上僧堂)이 있고, 금당 뜰에 광명대(光明臺: 현재 국보 제17호 석등)가 있고, 그 앞에 안양문(安養門)이 있다. 문 앞에 법당(法堂)이 있는데, 법당의 왼쪽은 선당(禪堂)이고 오른쪽은 승당(僧堂)이다. 그 앞에 종각(鍾閣: 범종각)이 있다. 종각 아래에 또 대여섯 곳의 당실(堂室)이 있는데, 회전문(廻轉門)ㆍ조계문(曹溪門)이 있다. 또 그 아래 수십 보쯤에 일주문(一柱門)이 있고, 그 아래 1리쯤에 영지(影池)가 있다. 절의 누각이 모두 이 연못 속에 비친다. 조전(祖殿: 조사당) 서쪽에 영산전(靈山殿)이 있고, 또 그 서쪽에 은신암(隱神菴)이 있다. 그 아래 골짜기에 극락암(極樂菴)이 있다. 조전 동쪽 골짜기에 동전(東殿: 약사전)이 있고, 동전 뒤에 국사비(國師碑: 원융국사비)가 있다.

2013년에 은신암 터에서 발견된 석조여래좌상 파불(破佛)과 석조신장입상.
이들 기록 중 현재 남아 있는 전각들은 무량수전, 안양루, 범종각, 영산전, 조사당, 응향각 등이 있으며, 회전문(조계문)은 2013년 복원되었다. 또한 응향각은 본래 무량수전 동쪽에 있었지만 1916년 무량수전 보수 당시 안양루 아래 동쪽으로 옮겨졌다.
이 두 기록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 가야할 부분이 바로 ‘영산전’이다. 1796년에 작성된 ‘경상좌도 순흥 태백산 부석사 영산전 미타후불탱급 미타관음개금기’에 따르면 이 전각에는 현재 대승사에 봉안된 보물 제575호 아미타목각탱이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영산전에 왜 아미타불을 봉안했는지 의문이다. 현재의 영산전에는 석가여래와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특히 1780년 작성된 박종(朴琮)의 「청량산유록(淸凉山遊錄)」에는 이미 이 때에 아미타목각탱이 무량수전에 옮겨져 있었다고 하여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목각탱이 안양루 아래 괘불대가 있는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금색전(金色殿)’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문제는 향후 다른 자료의 추가적인 발굴 등을 통해 확인해야 하는 과제로 남는다.
그렇다면 전성기의 부석사 가람배치는 어떠했을까.
필자의 현장 조사 결과를 토대로 살펴본다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서 일(一)자형 배치다.우선 동쪽으로 뻗은 가람의 배치의 상황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1054년경 세워진 원융국사비와 12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원교(圓敎: 의상)국사비가 있는 수비원(守碑院)이 있고 그 아래 조선시대 약사전 혹은 동전(東殿)과 더불어 승탑원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 ‘대장당(大藏堂)’과 ‘대봉지원(大鳳之院)’이라는 명문 와편이 출토된 근거로 현재 보물 제735호로 지정된 3종의 화엄경판을 비롯하여 1250년 충명(沖明) 국사가 조판한 ‘아미타경판’, 1219년 6월에 부석사에서 원당주(願堂主) 중태사(重太師) 지○(知○)스님이 편찬한 보물 1647호 ‘길흉축월횡간 고려목판(吉凶逐月橫看 高麗木板)’ 등 경판들이 봉안된 ‘대장당’과 관련 시설이 들어서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다시 동쪽으로 이어진 남쪽으로 시야가 확 트인 언덕 위에는 보물 제220호와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제130호가 있었던 ‘천장방(天長房)’ 구역이 확인된다.
동쪽으로 배치된 전각들은 부석사의 별원 시설로 경전의 판각과 인쇄를 비롯하여 천문관측시설로 추정되는 관련 기관 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무량수전을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현재 자인당에서 서쪽으로 50여 미터 지점에 1970년대까지 있었던 ‘은신암’이 있었고 여기서 다시 서쪽으로 향하면 극락암과 더불어 영은암(靈隱菴), 내원암(內院菴) 등의 암자가 있었다.

부석사 원경.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한 중심사역과 서쪽으로 암자구역, 동쪽으로는 대장당과 같은 부속시설이 있었던 별원구역이 있었다.
이들 암자 중 은신암과 극락암에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는데 독립운동가인 김창신(金昌臣)이 1937년 11월 2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부석사 탐방기에서는 ‘암자에 생식(生食)한다는 80넘은 비구니가 밤가루를 만들고 있으며, 그로부터 100여 미터쯤 되는 서편 산록에는 이제는 속가(俗家)로 되어버린 極樂菴(극락암)의 아름드리 되는 기둥만이 옛날을 말하고….’ 있다 하였다.
극락암의 경우 1860년경에 태백산사고를 지키는 비용을 대기 위해 암자를 허물고 기와와 재목(材木)을 팔았다고 했지만 김창신의 탐방기에는 속가로 변했다고 하여 19세기 후반에 암자 전체가 개인에게 매도된 것으로 보인다.
극락암은 또 18세기 고승이었던 야운당 시성(野雲堂 時聖: 1710~1776) 스님이 머물렀던 암자로『야운대선사문집(野雲大禪師文集)』에 ‘제부석사극락암벽(題浮石寺極樂菴壁)’이라는 시가 남아 있다.
遠岫撑天碧 먼 산봉우리는 푸른 하늘을 지탱하고
長江劈地喧 긴 강은 대지를 울리며 가로지르고
五更殘夜雨 새벽녘에 밤비는 잦아드니
愁殺倚風軒 시름에 잠겨 바람 부는 난간에 기대고 있네.현 부석사 서쪽의 능선과 골짜기에는 창건 이후 암자로 사용되던 여러 개의 건물터들이 확인되고 있어 전성기의 부석사에 많은 산내 암자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부석사의 가람배치를 종합해 보면 현재 무량수전을 축으로 하는 중심사역공간과 함께 동쪽으로는 대장당, 천장방과 같은 별원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서쪽으로는 산내 암자구역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석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석사 전성기 가람 배치를 완성하다 (0) 2022.11.26 무량수전 옆 부석에 새긴 '浮石' 두 글자는 누구의 글씨일까. (0) 2022.06.07 부석사이야기16 (0) 2015.02.24 부석사이야기 16 (0) 2015.02.24 부석사이야기 17 (0) 2015.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