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부석사에 천문관측소?????
    부석사이야기 2013. 11. 22. 12:56

    부석사하면 무량수전과 조사당, 안양루 등 여러 건축문화유산을 떠올리지만 현재의 부석사 사역은 과거의 사역보다는 많이 축소된 규모이다.

    부석사 경내에는 보물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석불과 석탑이 있는데 현재 까지 추정되기로는 모두 부석사 부속암자나 시설이 있었던 옛 절터에서 옮겨 온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최근에 발견된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부석사의 사역을 재구성해보면 현재의 사역과 함께 동쪽으로 부석사의 부속시설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대장당(大藏堂)과 수비원(守碑院) 구역이다. 이곳은 부석사 동쪽 원융국사비각 아래에 있는 사과밭으로 부석사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다. 이곳에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는 청자 백자편은 물론 기와들이 산재해 있어 상당기간 존속해 왔던 시설들임을 알 수 있다.

    수비원은 원융국사비명 말미에 언급한 시설로 아마도 원융국사의 비와 더불어 부석사내 중요 비석(의상국사비:부석본비)을 보호 관리하기위한 시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함께 이곳에서 '대장당'명문 와편이 출토되어 부석사에 대장경판(전반적인 불경을 통칭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석사의 대장경과 관련하여 원융국사비에서는 "이미 이전에 인사(印寫)한 대장경 일부(一部)를 정중한 봉안의식을 거쳐 안국사(安國寺)에 진장(鎭藏)토록 하라.”고 했다.

    이 기록으로 보아 부석사에 대장경 일부가 판각되어 있었으며 원융국사가 이것을 인경하여 그 일부를 안국사에 보관케했음을 알 수 있다.

     

    <새로 발견된 '대장당'명 명문와편 탁본>

     

    대장당 구역에서는 '대봉지원(大鳳之院)'이라는 명문도 함께 출토되었는데, 이 시설에 대한 정확한 용도는 알수없지만 수비원의 다른 이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대봉지원(大鳳之院)명 명문와편 탁본>

    이 탁본의 오른쪽에는 '중희(重熙)'명이 보이는데 중희는 거란 연호의 1032년~1055년까지의 연대를 가지고 있어 '대봉지원'이라는 건물이 원융국사가 부석사에 주석하던 시기에 건립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부석사 동쪽의 절터로 이곳에서 발견된 석불과 석탑이 현재 부석사로 이운되어 있다.

    이 지역의 지명은 당골 혹은 방골(房(方)谷)으로 불리는데 그동안 지명의 유래에대해 이곳에 부석사 스님들이 거주했던 승방이 있어서 그렇게 불렸다고 <<영주시지>>등에서는 밝히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발견된 명문 와편을 통해 이곳에 '천장방(天長房)'이라는 시설이 존재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천장방이라는 시설이 정확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용도를 추정할 수 있는 문헌기록이 남아 있어 천문관측시설 혹은 국가적인 제사를 담당하는 기관이 있었을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 있다.

    《보한재집(補閑齋集)》에 "고려(高麗) 사천감(司天監) 이인보(李寅甫)가 1198년(承安 3년 戊午) 경주도(慶州道) 제고사(祭告使)로서 산천(山川)을 돌며 제사지냈는데, 일이 끝나 장차 돌아가려던 저녁에 부석사(浮石寺)에 닿았다. "는 기록과 함께 동국이상국전집 제38권에 이규보가 동경 초토병마(東京招討兵馬) 때에 지은

     

     

    부석사(浮石寺) 장륙(丈六)에 올리는 축원문(祝願文) 을 보면 

    "요즘 동경(東京)의 역도(逆徒)들이 미친 듯 날뛰어 기반이 점점 굳어져 날로 더욱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에서는 아직까지 차마 주벌(誅伐)을 가하지 않고, 재차 부드러운 말을 내려 화복(禍福)으로 타일러 왔으나, 오히려 조금도 개전하는 마음은 없고 더욱 침탈을 자행하므로 끝내 오늘 죄를 묻는 군대를 내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저들 스스로가 불러들인 것이라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임금의 본의는 인물(人物)을 많이 살상하려고 하지 않으므로 진실로 그 백성들이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용서를 빌면서 모두 유신(維新)에 참여한다면, 다 사면하여 벌 주지 않고 다시 평민으로 대우해 줄 생각이시니, 그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마음이 이 같으십니다. 만일 부처님의 신통한 도움을 입어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 항복을 받고 승전을 거두어 개가를 울리면서 반사(班師)하게 된다면, 우리 임금의 본의일 뿐만 아니라, 또한 여래(如來)가 중생(衆生)을 사랑하는 본원(本願)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모관(某官)을 보내어 깨끗한 옷 한 벌을 올려 작은 성의나마 표하오니, 삼가 생각건대 ……".

    이를 보면 부석사가 당시 국가의 중요사안에 대해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기원도량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을을 엿 볼 수 있다.

    아울러 천장방이라는 시설과 관련 목은시고 권지27(牧隱詩藁卷之二十七)에

    以紙十三幅。送司天長房。抄曆日。

    종이 열세 폭(幅)을 사천대(司天臺)의 장방(長房)에 보내서 역일(曆日)을 베껴오다.라는 시가 있어 그 연관성이 주목된다. 

     <천장방(天長房)명 명문와편>

    현재까지의 수습 유물을 바탕으로 부석사의 과거 사역(寺域)에 대해 알아보았다.

    향후 추가적인 조사와 유물의 발견 등을 통해 부석사가 창건이후 조선시대까지 가지고 있던 사격(寺格)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

    '부석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석사 범종각에는 범종이 없다.  (0) 2014.03.02
    봄이 오는 부석사  (0) 2014.02.23
    부석사의 설경 '극락설국極樂雪國'  (0) 2013.11.27
    부석사에 얽힌 오해와 진실  (0) 2013.11.22
    부석사 가을 소식  (0) 2013.10.24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