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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범종각에는 범종이 없다.부석사이야기 2014. 3. 2. 15:48
<부석사 범종각: 종각에 범종은 없고 목어와 법고, 그리고 운판만이 근래에 조성되어 아침저녁 예불에 사용되고 있다.>
사찰의 건물 중 범종루(각)는 범종을 설치하기 위한 전각이다. 현재 남아 있는 우리나라 사찰의 범종루 대부분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부석사 범종루 또한 18세기 중반인 1748년에 만들어졌다.
최초 부석사 범종루의 건축시기는 알 수 없지만 1746년 화재로 인해 경내 전각 상당수가 소실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경내 전각의 상당수가 소실된 이듬해 삼응(三應) 스님을 비롯하여 지금의 충북 단양 영춘 현감 유언탁이 재목을 시주하고 사내 대중들이 힘을 모아 1747년 2월 복구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748년 6월 불에 탄 범종루를 비롯하여 만세루, 승당 등의 전각을 중건했다.
그러나 이때 화재로 범종이 파손되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1780년 8월 부석사를 방문한 박종이 남긴 청량산유록에 “범종각(梵鐘閣)이 있는데 쇠종을 매달았다. 종의 둘레는 몇 아름이어서 울리는 소리가 매우 장엄하다”고 한 걸로 보아 범종이 화마를 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후기의 문신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의 시문집 청성집[靑城集]에 '임백후와 함께 한 부석사 모임(與林伯厚期會浮石寺)‘이라는 시에 “上方鐘動月初來”라고 한 것으로 보아 화재로 소실된 종각 중수 후에도 범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보다 앞서 주세붕(周世鵬 : 1495~1554)의 시 ‘부석천년사(浮石千年寺)’에서 “鐘動斗午間 종소리는 하늘에서 치는가 보다.”라는 구절을 통해 범종각의 종이 임진왜란 이전인 15~16세기에도 있엄을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이헌경(李獻慶. 1719~1791)의 艮翁先生文集에서도 범종각에 범종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권두인(權斗寅, 1643~1719)의 ‘하당선생문집(荷塘先生文集)’에서는“暮鍾寒動木魚樓”라 하여 범종과 함께 목어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석사 범종각의 범종의 행방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묘연해 지는데 일설에는 조섬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증축하면서 공출해갔다는 얘기와 일제시대 전쟁물자로 약탈당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중 일제시대 약탈설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이미 1915년 부석사 중수 당시 범종각에는 범종이 없었음을 당시의 사진 자료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석사의 범종은 어디로 간 것일까.
범종의 실종과 관련한 기록이 거의 없어 당시의 몇 가지 사건을 토대로 행방의 전말을 추정할 수 있다.
1800년대 즉 19세기 중반까지 부석사는 나름의 사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806년 태백산 사고가 축조되면서부터 사단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부석사는 1808년까지 무량수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들에 대한 보수 공사를 실시한 일이 있었지만 이후 80여년간 별다른 중수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1884년에 이르러서야 ‘보덕각’을 중수한 사실만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약 80여년 동안 부석사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기간 부석사의 사세(寺勢)를 짐작케하는 자료가 있다. 1895년 발생산 산송과 토지매매 사건과 관련된 ‘산송문서(山訟文書)’와 ‘토지매매문기(土地賣買文記)’(이 두문서는 현재 직지사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다. 이 자료에 따르면 1868년 안동의 김건영 가문에 부석사가 사세가 기울어 부석사 극락암 뒤편의 산자락을 250금(金)을 받고 팔았다는 내용이다.
19세기 초까지 태백사사고를 지키기 위한 세금인 ‘정조(精粗)’를 수납하지 않았지만 1860년대에 이르러 갑자기 해마다 정조 100두(斗)를 바쳐야 했다. 정조 100두(斗)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5백만원+α정도(쌀 80㎏ x 25가마(1가마=20만원+α))에 해당한다.
지금이야 쌀이 흔하지만 당시로서는 쌀 25가마를 해마다 바쳐야 하는 일은 산중 사찰로서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현재의 시가로 쌀값을 계산하면 500만원 정도지만 실제 당시의 쌀가격을 고려한다면 그보다 많은 1000만원 가량 할 것으로 보인다.
부석사는 태백산사고 수비 비용을 대기위해 절 서쪽 극락암을 허물어 그 재목과 기와를 처분한 대금으로 1868년 공납을 납부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하여 토지처분은 물론 불기(佛器)는 물론 가마솥까지 팔아야 했고 이로 인해 경내 스님들도 남아있지 않아 향화(香華)가 끊긴지 4~5년이 되었다고 한다.
바로 여기서 부석사 범종각 범종의 행방이 파악된다. 일례로 영주 순흥의 소수서원을 건립할 당시 본래 숙수사가 있던 그곳에서 수백근의 구리(숙수사 범종 등 각종 청동 그릇류로 추정됨. 14세기 후반 왜구의 약탈로 절이 불타면서 방치되어 있다가 땅에 묻힌 것으로 보임)를 캐내어 서적을 구입하는 한편 학생들의 책과 장학전을 마련했다고 한다.
한편 계암 김령(1577~1641)이 쓴 ‘계암일록’에 따르면 1615년 보다 조금 앞선 해에 부석사 인근 계곡 모래밭에서 발견된 작은 종이 무량수전 안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 종 또한 그 행방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나 앞서 열거한 바와 같이 이 작은 종도 태백산 각화사 사고를 수비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매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1868년 부석사 토지를 매각하는 문서에 ‘불기(佛器)’를 매각했다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석사의 쇠락은 이미 182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아마도 이때부터 태백산사고의 수비비용을 납부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직지사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승사 목각탱부관계문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1860년대 말에 부석사가 쇠퇴하여 금색전에 봉안된 목각탱에 대한 향화가 끊긴지 40여년이 되었다고 했으니 그 시점이 대략 1820년대로 보인다. 즉 1808년에 태백산사고가 완성되고 난 직후부터 부석사는 사고 수비비용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시대적 상황속에서 부석사의 우람하고 웅장했던 범종은 사라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피해 1천여년을 이어온 수많은 전각과 보물들이 점차 사라져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부석사는 과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사라진 범종. 아마도 있었다면 범종각 안의 가운데에 있는 가장 굵은 나무에 매달려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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